책소개
한국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문학동네시인선」특별판 제2권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그리움이 차오르지 않으면 뱉어낼 수 없는 말들로 한국 시단에 고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허수경 시인의 시집이다. <실천문학>으로 데뷔한 허수경 시인은 여자가 아닌 여성의 목소리로 세상사의 많은...
2. 시인 허수경.
믿음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믿음은 오랜 시간 누군가를 지켜보고 그 사람이 어떤 말과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목격해야 한다. 시인이라면 그 시인이 어떤 시를 썼는지 지켜봐야 한다.
허수경의 시를 좋아한다. 허수경의 시는 일정 이상의 경지를 넘었다. 그래서 군더더기가 없고 겉멋도 없고 치기어린 유치함도 없다. 허수경은 1집 때부터 이미 완성형 시인이었다.
나는 시를 좋아한다. 하지만 시인 자체에도 관심이 있다. 나는 누가 어떤 말을 멋들어지게 했는지 보다 그 말을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관심 있다. 곁에서 지켜본 뛰어난 시인이 있다. 한국에서 탑이라 할 수 있는 시인은 시를 잘 썼다. 좋은 시라서 어린 날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런데 그를 꽤 오랜 시간 직접 목격한 후, 시의 매력이 사라졌다.
그 시인은 자신만 아는 시인이었다. 잘난 척 하는 시인이었고, 군림하는 시인이었다. 주변에서 떠받들어 주다보니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시인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너무 차가웠다. 그 시인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계산 없이 누군가를 사랑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해일 수도 있다. 시인도 시인만의 고뇌가 있겠지. 하지만 10년 가까이 지켜봤다면 내 판단도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히 그 시인의 시는 좋다. 많은 시인들이 칭송하는 시인들의 시인이다. 하지만 그 시인의 시로는 리포트를 쓰고 싶지 않다.
나는 허수경의 모든 시집을 가지고 있다. 한 시인이 발표한 모든 시집을 지니고 전 작품을 읽는 일은 내게 큰 즐거움이다. 그 시인에 대한 사랑과 믿음의 표현이다. 그리고 나는 허수경의 모든 시집으로 리포트를 썼다. 쓰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허수경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하지만 허수경은 그 글이 말하고 시인의 얼굴과 시인의 눈빛이 말한다. 나는 허수경이 미덥다.
젊은 시인과 젊은 노점상들과 젊은 노동자들에게 아부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시인이 있다.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문학동네, 2011, p143
그는 시집을 두 권 낸 이후 독일로 날아가 이십여 년 째 고고학을 전공한 허수경이다. 등단한 시인임을 감안했을 때 이는 어쩌면 다소 뜬금없는 행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고고학과 시의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함 앞에서-그 거대함이란 고고학의 경우에는 ‘시간’, 시의 경우는 ‘세계’ 정도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인간이 무언가를 끊임없이 발굴해내고자 하는 의지일 것이다. 친분이 있던 소설가 신경숙과의 전화 통화에서 시인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무엇을 하든 결국은 시로 가기 위한 길일거야.” 그리고 이 ‘시로 가기 위한 길’ 위에는 시인의 무수한 상처와 고뇌의 흔적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시인은 오늘날의 아픈 사회를, 그 사회 속에 품어진 인간이기에 숙명적으로 아파오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