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 때 나는 서양문학사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수업에서 내가 받았던 기말 과제는 서양 역사의 한 시점을 골라 그 시대 사람이 되어 일기를 써오는 것이었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시대의 일기를 쓴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나는 어느 시대의 누가 되어볼까 고민하다가 불현듯 피렌체의 명문가인 메디치 가문이 떠올랐다. 수업 시간에 배운 적은 없었지만 어디선가 얼핏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조금 더 알아보던 중,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 왕가에 시집을 간 카트린 드 메디치라는 여자가 흥미롭게 느껴졌다. 카트린 드 메디치는 헨리 2세의 부인이 되어 훗날 프랑스의 실세가 되었던 여자이다. 그녀가 시집 가던 당시에 피렌체서부터 프랑스까지 수백 명의 요리사와 하인을 거느리고 갔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그녀를 따라간 요리사 중 한 명이 되어 당시 프랑스의 문화를 체험하는 이방인의 느낌으로 일기를 썼다. 총 다섯 편의 일기를 써야 했는데, 쓰는 내내 이야깃거리를 찾고 하루하루의 일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그러면서 메디치가는 내게 좋은 인상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 과제는 A+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