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자리 찾아보겠노라 발심했다면 누구나 한번쯤은 라즈니쉬를 만나야 한다.
훗날 그를 비아냥거리며 떠나더라도 오쇼 라즈니쉬를 만나야 한다.
80년대, 닭장과 최루탄이 일상적이던 그 시절 ‘명상’은 회색분자들의 놀음이었다.
자유를 열망한 대가로 권력에게 일신을 저당 잡혀가는 학우들 눈치를 봐가며 토플을 뒤척거리던 캠퍼스에서 ‘명상’이란 불순한 무엇이었다. 그것은 금이 간 유리창에 적혀있던 ‘사주, 작명, 궁합’이라는 단어만큼이나 정신에 해로운 마약이었다.
80년대 후반, 김정빈의 ‘단(丹’)과 바바 하리다스의 ‘성자가 된 청소부’가 출판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명상’도 대중화, 상업화될 수 있다는 조짐이었다.
그 후 숱한 인도 출신 성자들이 우리 사회에 소개되었는데 단연 백미는 훗날 ‘오쇼 라즈니쉬’라 불리는 ‘B.S. 라즈니쉬’가 아니였을까.
‘아리마테아 요셉’ 성인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던 나는, 지산동 성당에서 성서공부 모임과 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가톨릭이 주는 경건함과 지적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개신교와는 다른 묵직한 전례의식과 정의구현사제단이 보여준 실천하는 신앙을 지켜보면서 스스로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에 자랑스러웠다.
몸이 불편하던 히지노 형님의 휠체어를 밀면서 지산동 골짜기를 내려올 때는 마치 내가 예수님의 제자라도 된 것처럼 우쭐했었다.
성당 청년회장으로 임명된 후부터는 내 스스로 반은 성직자라 생각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는 신학교에 진학하여 사제가 되고자 하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척추 1급 장애자인 아버지와 여동생만 둘이라는 현실이 사제의 길을 막는 커다란 장애였다.
대학을 마친 후, 나는 첫 직장이었던 보험회사를 불과 몇 달 만에 그만두고 친척어른을 따라 가스 사업을 하게 된다.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면 그 돈으로 부모님의 생계를 해결하고 그 후에 편안하게 신학교에 진학하여 사제가 되겠다는 나름 전략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한참 부족한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