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식민지 시대의 분노와 복수심, 해방의 감격과 무질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인간 정신을 모색하고자 한 작가 허준의 중단편선 『잔등』. 허준의 전작을 망라하기보다는 미학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을 선하여 수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으며, 중간에 자료가 멸실되거나 연재가 중단된 작품과 일본어로 발표된 콩트...
광복 직후에 ‘나’는 친구인 방과 함께 만주에서 서울로 돌아오다가 그와 헤어지게 되고 화물차를 얻어 타 수성까지 오게 된다. ‘나’는 제방을 따라 내려가다가 한 소년을 만나는데, 이 소년은 뱀장어를 일본인에게 팔면서 돈 많은 일본인을 알아내어 한국인에게 알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일본인들에 대한 사람들의 열성적인 복수의 모습을 망연히 바라만 본다. ‘나’는 방을 만나려고 청진역으로 갔다가 국밥 장사를 하는 할머니를 만난다. 할머니는 서른에 남편을 잃고 독립운동하던 아들까지 잃은 사람인데도, 난민이 되어 쫓겨나게 된 일본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는 너그러운 태도를 보인다.
‘나’는 일본이 패망한 직후 해방을 맞이한 만주에서 잔류 일본인을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를 관찰하고 있다. 뱀장어를 잡아 파는 소년에게서 보이는 일본인에 대한 분노, 이와 대조되는 국밥집 할머니의 무한 인간애. 제목 ‘잔등’이 ‘쇠약한 등불’임을 미루어보건대 작가가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던 옹호하는 쪽은 할머니의 인간애이다. 소년에게 ‘정치성’이 보이자 조금씩 시선을 거두어버리고 ‘도덕성’만이 드러나는 할머니에게 더 많은 시선을 줬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잔등은 외로운 등불이다. 작가의 마음이 가는 인간애로 상징되는 등불은 애석하게도 쇠약한 상태니까 몹시도 외롭다. 아무리 불타오르려고 해도 불의 힘이 약해서 그러지 못한다. 쇠약하게나마 불의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할머니의 인간애가 만주, 조선에서 그런 셈이다. 무려 36년간의 억압하고 잔인했던 일본제국주의의 통치, 거기서 이제 막 벗어난 상황이라면 열에 아홉은 ‘분노’한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역사 과목을 공부했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광복 이후 잔류 일본인에 대해서는 배운 기억이 없다. 심지어 불과 몇 개월 전에 본 한국사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허준의 <잔등>은 교과서의 내용만이 세상사 전부인 양 알고 지내온 나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깨닫게 할 만큼 신선했다.
그렇다고 해서 작품을 쉽게 읽은 것은 아니다. 읽는 내내 생소한 단어들의 출현으로 몇 번이고 읽기를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주 수업을 들으며 어떤 작은 소재라도 작가가 의미 없이 설정한 소재란 없음을 여실히 느낀 나는 ‘잔등’에는 작가의 의도가 어떻게 형상화되었는지를 찾아보자며 스스로를 독려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잔등>을 펼쳐두고 몇 차례 더 내적갈등을 겪었음을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