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씨와 이 씨는 박 씨네 하숙생들이다. 셋은 버스를 타고 군하리의 혼인집으로 가고 있으며 박 씨는 군대 기피자였고, 지금은 초등학교 교사를 시작한 처지이다. 그의 곁에는 살찐 젊은 여자가 앉아 있으며 그녀는 술집 작부이다. 이들 셋과 여자는 같은 곳에서 하차하고 밤늦게 혼인집을 다녀온 세 사람은 거나하게 취해 버린다. 박 씨와 이 씨는 낮에 만났던 여인의 술집으로 가고, 김 씨는 혼자 여인숙에 눕는다. 침구를 가지고 방에 들어온 여인숙 아이를 보며 김 씨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면서 잠이 들고 술집에서는 술판이 벌어지며 술집 여자는 김 씨가 늙은 대학생이라는 말에 놀라고 ......<중 략>
“…일어설 때 보니 가슴에 훈장이 달려 있다. 그는 그를 가까이 불러서 그 훈장을 들여다본다. 둥근 바탕에 가로로 5년 2반이라 씌어 있고 그것을 가로질러서 세로로 반장이라 씌어 있다. 조잡한 비닐 제품이다.
「너 공부 잘 하는구나」
「예. 접때두 일등했어요」
아, 이건 뻔뻔스럽구나, 못생기고 남루한 옷을 입을 주제에.”
똑똑하고 다부진 아이의 모습을 보며 그는 냉소한다. 못생기고 남루한 옷을 입은 주제에 어린날의 자신처럼 눈을 빛내며 꿈을 좇는 모습이 이상적이기보다는 다만 뻔뻔하고 우스워보인다.
“…너는 아마도 너희 학교의 천재일테지. 중학교에 가선 수재가 되고, 고등학교에 가선 우등생이 된다. 대학에 가선 보통이다가 차츰 열등생이 되어서 세상으로 나온다. 결국 이 열등생이 되기 위해서 꾸준히 고생해 온 셈이다. 차라리 천재이었을 때 삼십 리 산골짝으로 들어가서 땔나무꾼이 되었던 것이 훨씬더 나았다. 천재라고 하는 화려한 단어가 결국 촌놈들의 무식한 소견에서 나온 허사였음이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못 된다. 그들은 천재가 가난과 끈질긴 싸움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열등생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몰랐다. 누구나가 다 템즈강에 불을 쳐지를 수야 없는 일이다.”
문단을 읽는 순간 심장을 무언가 관통하는 기분이었다. 누구나가 다 템즈강에 불을 지를 수야 없는 일이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생면부지인 작가에게 위로받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글을 열심히 쓴다고 해서 모두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특출난 재능을 얻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에는 신이 편애한 소수의 인간들만 살아남게 되는 것이고, 비교적 덜 보살핌받는 이들은 벽처럼 느껴지는 자신의 예술적 한계에 부딛혀 주저 앉거나 자신의 무능함을 저주하며 바락바락 벽에 기어오른다. 비단 예술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천재가 널리고 널린 사회에서 하루에도 수백번씩 자리다툼이 일어난다. 그들은 서로를 밀어내고 밀려난다. 그리고 그 밀려난 자리에 늙은 대학생이 있다. 가난과의 싸움에서 꿈을 잡아먹히고 끝내는 열등생으로 추락하고 마는 남루한 지식인 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