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5개
-
수신사 파견 제1차부터 4차까지2024.09.191. 조선의 수신사 파견 1.1. 1차와 2차 수신사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선은 모두 4차례에 걸쳐서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하게 되었다. 첫 번째 수신사로 파견된 인물은 김기수이다. 187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김기수는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후 예조 참의로 임명되어 수신사에 선발되었다. 그는 76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에 파견되어 일본의 근대화 모습을 둘러보고 귀국 후 이를 기록한 『일동기유』를 저술하게 된다. 『일동기유』는 총 4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을 떠나 일본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 일본에서...2024.09.19
-
명성황후에 대한 재평가2024.10.091. 명성황후에 대한 이해 1.1. 명성황후의 성장과 집권 배경 명성황후는 1851년(철종 2) 경기도 여주에서 영의정에 추증된 여흥 민씨(閔氏) 치록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한 모습을 보여 주변에 알려졌다. 16세에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고종 비(妃)에 간택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궁인 이씨로부터 완화군을 얻고 비를 돌보지 않았으나, 명성황후는 예의범절이 밝아 칭송을 받았다. 완화군이 태어나자 대원군은 이를 기뻐하였고 명성황후는 이에 분개...2024.10.09
-
명성황후 재평가2024.10.091.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고찰 1.1. 명성황후의 출생과 성장 명성황후는 1851년 여흥 민씨 치록(閔致祿)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여흥 민씨는 제3대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와 제19대 숙종의 왕비 인현왕후를 배출한 명문가였지만, 명성황후가 어린 시절에는 이미 몰락한 상태였다. 명성황후는 8세 때 부모를 여의고 서울 친척집에서 자라났으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책을 열심히 읽었다고 전해진다. 1864년 12세 때 고종이 왕이 되자, 섭정으로 권력을 장악한 대원군 이하응은 안동 김씨 일족의 세도정치를 뿌리 뽑고 이름뿐인 왕권을 ...2024.10.09
-
근대 개항기 사건2024.10.191. 근대 개항기의 경과와 의의 1.1. 개항 과정의 이해 19세기 중반 이후 조선은 서구 열강들의 강압적인 개항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다. 1866년 미국 상선 셔먼호의 침입으로 촉발된 신미양요와 1871년 미국의 신미양요, 1876년 일본의 운요호 사건 등으로 인해 조선은 점차 외세에 개방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조선은 흥선 대원군의 쇄국 정책으로 외세를 막아내고자 하였지만, 결국 1876년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개국하게 되었다. 강화도조약은 조선과 일본이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다. 이 ...2024.10.19
-
조선에대한 청과 일본의 입장2024.09.011. 갑신정변과 조선의 대응 1.1. 갑신정변의 배경과 전개 갑신정변의 배경과 전개는 다음과 같다. 임오군란 이후 고종은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때 개화정책을 둘러싸고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온건파는 조선과 청나라의 사대관계를 주장하였지만,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의 급진 개화파들은 청나라의 간섭을 배격하고 청나라로부터 벗어나 서양의 기술과 근대 사상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 사이의 대립이 깊어지면서 정변을 계획하게 된다. 당시 청나라와 프랑스 ...2024.09.01